"마른 잎 다시 살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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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잎 다시 살아나"

최예용 0 6533
"8년을 버틴 싸움, 80년을 못 버티겠나"
최예용 2013. 03. 04
고압 송전탑 반대 주민들 한전 본사 상경투쟁 동참기

원전정책과 맞물려 '이기기 힘든 싸움', 그러나 '마른 잎 다시 살아날' 때까지 싸운다

허리가 거의 90도로 구부러진 할머니 한 분이 대한민국에서 잘 나간다는 회사들이 즐비하고 첨단 마천루들이 여기저기 하늘을 찌르는 강남구 코엑스 건너편 대로를 걷고 있다. 한 손에는 등산용 포트를 집었고, 다른 한 손에는 신문지에 말린 작은 방석 하나가 들렸다. 할머니는 한국전력 본사 차량 출입구 왼쪽 기둥 앞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구걸을 하려는 거라면 차량이 출입하는 곳보다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 더 나을 텐데….

지난달 27일 같은 시각, 허리 구부러진 할머니가 앉은 곳에서 불과 50여m 떨어진 한국전력 본사 정문 앞. 이곳에도 어떤 사람이 바닥에 앉아 있다. 웃옷에 달린 털모자를 쓰고 있어 언뜻 분간이 가지 않는다. 자세히 살펴보니 역시 할머니다. 이 할머니 역시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그 위에 놓은 작은 방석에 앉아 있다.

왕복 10차선은 족히 되는 큰 도로에 보도도 넓고 건물도 커서 이곳에 부는 바람은 봄바람이라고 하기엔 상당히 매섭다. 할머니 무릎에는 작은 담요가 덮여 있지만 바람은 속살을 파고든다. 그 곳에서 다시 50여m 떨어진 한국전력 본사 남쪽 출입구. 양 옆으로 두 남자가 서 있다. 한 명은 10대로 보이는 앳된 청년이다.


mil1.jpg » 지난 2월27일 오후 6시께 경남 밀양시 단장면 동화전 마을 초고압 송전선로 건설 예정지에 사는 75살 할머니 이숙자씨가 이날의 세번째 일인시위를 하기 위해 서울 강남구 한전 본사 차량출입구를 향해 가고 있다. 옆에 있는 이는 이날 단식농성 지원 나온 서울에 사는 한 주부다

민영화되었다고 하지만 국가의 전력사업을 독점하는 실질적인 국영기업체로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신의 직장'이라고 불리는 곳. 한국전력과 여러 계열사들이 모여있는 본사 주변에 이 사람들은 서거나 앉아서 뭐 하는 걸까. 이들이 들고 있는 피켓이 없다면 누구도 이들에게서 공통점을 찾아내기 힘들 터이다.

이들은 멀리 경남 밀양의 산골마을에서 올라온 한 동네 주민들이다. 차량 출입구 옆에 앉은 할머니는 75살, 정문 앞에 앉은 할머니는 74살 그리고 남쪽 문 양쪽에 선 이는 10대 중3 학생과 40대 후반의 아저씨다. 이들은 초대형 고압 송전 철탑이 동네를 가로지르거나 마을 뒤쪽을 지난다는 계획에 놀라서 들고 일어선 '밀양 765Kv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 회원들이다.

"8년을 버틴 싸움, 80년인들 못 버티겠나", "신고리 핵발전소 5-6호기 증설 계획 취소하고, 765Kv 송전탑 건설 즉각 백지화하라!", "조환익 한전 사장님, 밀양 송전탑 주민들의 고통에 귀기울여 주세요!!", " 평생 농사만 지어온 어르신들, 책사업 반대하러 상경했네, 혀 귀기울이지 않는 한전, 지사지 쫌 해 보소. 제~발!!", "주민 동의 없는 국책사업 밀양 송전탑 OUT", "있는 전기 아껴 쓰고 핵발전소 그만 짓자!", "밀양 어르신들의 삶의 터전을 지켜주세요. 한전은 송전탑 공사를 당장 중단하라", "밀양 송전탑 공사 즉각 중단하라!", "니 집앞이 싫으면 밀양에도 짓지 마!!", "송곳같이 철탑 꽂힌 산야, 전멸당할 생명들, 탑이 아닌 삶을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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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력 정문 옆에 세워진 농성장 천막 앞쪽에 쪼르륵 놓인 피켓들이 저마다 나를 보아 달라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세워져 있다. 8개월도 아니고 8년 이란다. 노무현 정부 때부터 이명박 정부를 거쳐 이제 박근혜 정부까지 정부 3개를 거치면서 밀양 송전탑 문제는 주요 사회문제가 되었다.

몇 년 전인가 유명한 베니스 국제영화제인가에서 '밀양'이란 제목을 단 한 한국영화의 여 주인공이 여우주연상을 받았을 때 이 지역이 꽤 알려졌었는데, 지금은 ‘꼬부랑 할머니들이 송전탑 반대운동을 치열하게 하는 곳’으로 더 많이 알려지고 있다.

아는 사람들은 아는 표현이지만 밀양의 송전탑이 세워질 곳은 ‘영남 알프스’라고 불리는 수려한 산악지역이다. 높은 산들이 줄지어 서 있어 유럽의 알프스 못지 않은 한반도 백두대간의 일부다. 이 지역 어디엔가를 가면 여름에도 서늘한 바람이 불어나오는 ‘얼음골’이란 신기한 곳이 있고, 또 얼마 안 가서 국내 최대 내륙습지인 ‘우포늪’이 연결되어 있다.

가을이면 이 근방 사람들 수천, 수 만 명이 구경 오는 산 위의 대평원 억새군락지역도 있다. 케이티엑스 건설 당시 산림파괴와 도롱뇽 서식지 훼손을 우려한 한 스님이 오랫동안 단식투쟁을 했던 곳도 멀지 않다. 객지로 나갔던 사람들이 여기저기 제법 멋진 집을 지어 여생을 보내려는 산세 좋고 교통 좋은 곳이 바로 초고압 송전탑이 줄지어 세워질 곳이다.

밀양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지칠 줄 모르고 투쟁을 이어가자 이곳 출신이라는 여권 실세 국회의원이 마지못해 나서고, 지난 대선 시기 여당의 대선후보로까지 나섰던 한 실력자가 고충처리위원장으로서 분쟁조정을 시도했다. 야당인사들이 앞장서 국회에서 토론회를 조직하고 기자회견을 주선한 게 수 십 차례다.

하지만 이 사업은 도로를 놓는 사업과는 차원이 다른 국가 전력정책에 의한 광역송전망 사업! 바로 원자력발전소와 직결된 일이었다. 때문에 지난 대선에서 강력한 야권 후보가 밀양문제에 대해 분명하게 송전탑 반대 의사를 표시하고 공약으로까지 내걸었었지만 실제 그 후보가 당선되었더라도 과연 공약이 지켜질 수 있을까 의문스러웠다. 더욱이 울산의 신고리원자력발전소에서 출발한 송전탑들은 반대에 부딪힌 밀양지역만 제외하고 이미 세워진 상태다.

환경운동하는 사람들의 말 중에 이런 것들이 있다. ‘환경운동이 뭐 대단한 것 같지만 실은 100번 싸워 1~2번 이길까 말까 할 정도로 실제로는 거의 모두 진다’, ‘동강운동은 삽을 대기 전 단계에서 운동이 일어나 이겼고, 새만금운동은 이미 오래 전에 삽질을 시작한 뒤에야 운동이 일어서 결국 졌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왠지 조금은 냉소적이고 자조적으로 하는 말들이다.

그럼,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은 어떤 상태인가? 백전백패 해온 핵발전소 반대운동과 직결된 문제이고, 계획단계가 아닌 실행단계 그것도 이미 절반 이상의 송전탑이 건설된 사업이다. 이러한 정황만으로 보면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은 이길 가망이 거의 없어 보인다.

허리 꼬부라진 할머니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하기가 어려웠던지 이날 농성천막을 찾은 민주통합당 경남도당위원장 장영달 전 의원은 ‘금방 이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천하의 나쁜 놈들, 어찌 주민들을 폭력적으로 다치게 한단 말인가’라며 연신 한전을 나무란다.

자신도 한때 정부 여당을 해봤던지라 핵발전소와 관련된 문제를 이길 수 있다고 하기 어려웠을 게다. 그래도 장 위원장은 밀양 현지를 찾아 주민들을 위로했고 연행된 주민대표를 위해 시청과 경찰서 앞마당에 주저앉기를 여러 차례 해 주었다.

장 위원장은 농성천막 한 켠에 앉아있는 10대 청년을 보고 ‘고등학생이 아니냐?’고 물었고 옆에 있는 이가 ‘이번에 연행된 주민대책위원장의 아들입니다. 고1 나이인데 일년 쉬고 올해 중3이래요.’라고 하자 손을 꼭 잡고 어깨를 두드리며 ‘아버지가 대단한 분이더라. 힘 내라’고 격려해 준다. 그 아버지란 분은 밀양시 단장면 동화전 마을 대책위원장으로 동겸이 아빠 김정회(42)씨다.

한전 앞에서의 단식농성이 시작된 지 벌써 한달 여. 재작년 3월 발생한 일본 후쿠시마 핵참사로 핵발전소의 안전문제가 크게 제기되었고 작년 초 주민 한 분의 분신사망을 계기로 밀양문제가 전국의 사회적 의제로 떠올랐다. 이제 밀양문제는 한반도 전력정책과 원자력발전정책의 계속 추진여부에 작지만 하나의 상징적 걸림돌로 인식된다.

그간 그래왔던 것처럼 간단없이 발로 툭 차 버리면 흔적 없이 날아가 버릴 작은 걸림돌에 불과하지만, 그 걸림돌에 온 몸을 던져 매달리고 있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영남지역의 70~80대 노인 수 십 명이다. "8년을 버틴 싸움, 80년을 못 버티겠나"라는 구호에 특히 눈길이 가는 이유가 여기 있다.

각종 사회문제의 현장에서 흔히 들어온 구호인 ‘목숨 걸고 뭐 하자’는 말이 밀양에서는 단순한 슬로건이 아닌 것이다. ‘내가 살면 얼마나 살겠나, 이치우 양반이 먼저 그렇게 했다. 나도 그렇게 할란다’

mil5.jpg » 지난달 27일 점심 시간, 서울 강남구 한전 본사 정문 앞에서 일인시위를 하고 있는 74살 엄복이 할머니.

농성장의 주요 일과는 아침 7시30분께에 모여 한 시간 동안 출근시간에 아침 일인시위를 하고, 점심시간인 11시30분부터 한 시간 그리고 오후 5시30분부터 한 시간 그렇게 하루 세 차례 한전 건물로 통하는 출구 앞에서 ‘선전전’을 하는 것이다.

밀양 현지에서 마을 별로 3~4일 간격으로 조를 짜서 올라와 교대한다. 현재 올라와 계신 분들은 동화전 마을의 네 분이다. 한전 차량출입구를 맡은 분은 75살인 이숙자 할머니, 정문에서 필자와 하루를 같이 하신 분은 74살 엄복이 할머니다.

엄 할머니는 작년 여름에 송전탑 건설현장인 산에 오르다 쓰러지시기도 했다. 다른 한 분은 48살의 하 선생님으로 ‘서울서 직장 다니다가 귀농했는데 부동산에서 송전선로 예정지라는 설명을 안 해줘서 싼 값이라 샀다가 철퇴를 맞은 경우’라고 한다.

서울지역과 전국에서 환경사회단체, 정치권 그리고 일반 시민들이 지지방문이 이어진다. 오늘은 하루 종일 필자와 한 시민이 지원했다. 오전에 민주당에서 그리고 오후에 홈스쿨링을 하는 여학생 한 명이 농성장의 10대 참가자 친구라며 찾아왔고 잠시 뒤 하 선생님의 지인 두 분이 방문해주었다.

단식농성이라 점심을 먹지 않는다. 오후 ‘선전전’을 하고 잠시 쉬는 시간. 하 선생이 할머니들과 말을 나눈다. “사람 많은 서울에 왔는데, 할아버지들 두 분 꼬셔올까요? 데이트 함 하실래요?”, “돈 많나 물어보고 데려와, 안 그러면 귀찮기만 해.”, “작년에는 이 맘 때는 쑥과 냉이를 캐러 다녔는데…. 할머니, 수정과는 어떻게 만드는 거에요?”, “먼저 밥을 주먹만치만 해. 그리고….” 다른 할머니가 옆에서 거든다 “아냐, 그래도 밥은 좀 많이 하는 게 나아….” 이러는 사이 오후 쉬는 시간이 금방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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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문에서 할머니와 함께 세 차례의 일인시위를 섰는데 아침에는 추웠어도 출근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이어져서 ‘선전전’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 앉은 할머니께서 ‘제법 사람들이 드나네요. 어제는 별로 안보였는데’ 하신다.

점심시간과 퇴근시간대는 사람이 적어서 썰렁했다. 가만히 서 있는데 바람이 파고들어 한기가 든다. 무릎을 굽혔다 폈다 허리를 돌려보지만 한기가 사라지지 않는다. 꼼짝 않고 앉아서 썰렁하고 냉랭한 서울 강남 바람을 온 몸으로 받아내는 할머니는 오죽 할까.

" 서럽다 뉘 말하는가 흐르는 강물을
꿈이라 뉘 말하는가 되살아 오는 세월을
가슴에 맺힌 한들이 일어나 하늘을 보네
빛나는 그 눈 속에 순결한 눈물 흐르네
가네 가네 서러운 넋들이 가네
가네 가네 한많은 세월이 가네
마른 잎 다시 살아나 푸르른 하늘을 보네
마른 잎 다시 살아나 이 강산은 푸르러"


소위 투쟁가로는 적절치 않지만 환경운동을 상징하기에는 그만이라고 생각해 온 노래 '마른 잎 다시 살아나'를 추위를 이겨보려 읊조려 보았다. 가사의 구절 구절이 옆에 앉아 계신 어르신의 삶이자 바램이 아닐까 싶어 서러운 생각이 스민다.

밀양 어르신들과 주민들의 상경투쟁은 2월28일자로 일단 마감했다. 한 달여 간의 투쟁 끝에 고소고발 등 법적 소송을 모두 취하하기로 합의했다. 아쉽지만 작은 성과다. 하지만 갈 길이 멀다. 봄이 되면서 송전탑 건설이 재개되려 하고 있고 주민들을 돈으로 매수하는 시도가 본격화하고 있다.

" 큰 싸움이 예고되어 있어서 일단 서울 상경투쟁을 접고 잠시 충전을 하려고 합니다. 이기기 어려운 싸움이라는 말은 주민들도 잘 알고 있지만, 한데 모여 있어서 그런 불안들을 잠재울 수 있었지요. 그래서 서로 힘을 내고 그렇게 낙관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지금껏 잘 막아왔으니 앞으로도 잘 막아 내겠죠.”

밀양대책위원회 사무국장 이계삼 선생의 말이다. 밀양에서 고등학생 아이들을 가르치던 ‘시골학교’ 교사였던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글을 쓰며 새로운 인생을 살려 했단다. 헌데 마침 터진 이치우 어르신 분신 사망 사건을 계기로 모든 것을 미루고 대책위원회 활동에 뛰어들었다.

이렇게 ‘밀양싸움’에는 70~80대 어르신들의 ‘한 많은 세월’과 남은 여생, 40대 귀농자와 전직 교사의 ‘흐르는 강물’ 과도 같은 새로운 삶 그리고 중3짜리 대책위원장 아들의 ‘푸르른 하늘’과도 같은 꿈이 한데 엮이고 뭉쳐져 있다. 그리고 한결같이 바란다. ‘마른 잎 다시 살아나 이 강산은 푸르러’라고.

글·사진/ 최예용 한겨레 물바람숲 필진, 환경운동연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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