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직장 다 잃어도 제조사는 외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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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직장 다 잃어도 제조사는 외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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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넘게 고통받고 있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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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비뉴스 2014 9 4

유선희 최선우 기자




이모씨(38·여·경기도 고양시)는 5년 전 기관지가 약한 아이에게 도움이 될까 해서 가습기를 샀다. 위생적으로 관리하는데 도움이 될까 해서 ‘애경 가습기메이트’도 함께 썼다. 여름을 빼고 1년 내내 가습기를 사용하면서 더 건강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다만 가습기를 사용한 후 집안에 하얀 먼지가 뿌옇게 앉았는데, 걸레로도 잘 닦이지 않아 고생했다고 한다. 그런데 가습기를 쓴 지 1년 반이 지난 2010년 10월 무렵부터 몸에 이상한 증상이 나타났다. 


“갑자기 기침이 숨을 못 쉴 정도로 너무 심하게 나오는 거예요. 열도 높았고 가래도 계속 끓어올랐어요. 처음에는 단순한 감기인 줄로만 알고 동네병원을 찾았죠.”


건강 위해 가습기 썼는데 천식 등 이상 증상  


동네병원에서는 그냥 감기약을 처방해줬다. 열을 떨어뜨리는 해열제도 먹고 2~3일 사이 링거(수액) 주사도 세 번이나 맞았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대학병원을 찾았다. 거기서 급성천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병원에서는 바로 입원을 권했지만 집에 아이를 혼자 두고 입원할 상황이 아니어서 의사에게 처방받은 마약성 진통제로 버텼다고 한다. 그러다 호흡이 극도로 가빠지는 경험을 한 뒤 결국 입원을 했고, 일주일 넘게 치료를 받았다. 그 후에도 1년에 4~5번은 급성천식으로 입원해야 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상황이라고 이씨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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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씨가 사용한 애경 가습기메이트. / 사진=이모씨 제공]
 

이씨가 처음 입원치료를 받을 즈음, 아들에게도 비슷한 증상이 나타났다. 천식과 함께 장염, 폐렴 등으로 1년에 1~2번은 병원 신세를 져야 할 만큼 아이는 전반적으로 건강이 좋지 않다. 올해 10살인 아이는 한창 밖에서 뛰놀고 싶은 때지만 달음박질이라도 한 번 하면 너무나 힘들어 한다. 갑자기 호흡이 가빠져 숨을 쉴 수 없는 위기가 종종 닥치기 때문에, 입안이나 기도의 분비물 따위를 빨아내 숨을 쉴 수 있게 해주는 흡인기를 늘 갖고 다녀야 한다. 


병원에 다니면서도 자신과 아이가 왜 아픈지 알지 못했던 이씨는 2011년 초 ‘서울의 한 병원에서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산모들이 잇따라 숨졌다’는 보도를 접하고서야 자신도 같은 피해자임을 알게 됐다고 한다. 김선경 환경보건시민센터 운영위원은 인터넷신문 <프레시안> 기고를 통해 “(피해자들의 경우) 가습기에 첨가한 살균제가 미세한 입자로 공기 중에 분출됐고, 그 미세입자들이 호흡기로 침투해 폐 세포가 손상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건강이 약해진 이씨는 사무직으로 일하던 회사에서 2010년에 퇴사했고 아직 다른 일을 못하고 있다. 배우자와 이혼한 상태라 아이와 함께 부모님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다. 건강과 생계수단을 함께 잃었지만 이씨는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지난 3월 11일 정부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을 상대로 폐손상 의심사례를 조사한 결과, 폐가 굳는 ‘섬유화’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살균제 피해) 가능성 거의 없음’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보건복지부 질병관리본부가 가습기 살균제 폐손상 의심사례로 조사한 361명 가운데 127명은 ‘거의 확실’ 판정을 받았고 31명이 ‘가능성 높음’, 42명이 ‘가능성 낮음’으로 분류됐지만 이씨처럼 ‘가능성 거의 없음’ 판정을 받은 경우가 144명, ‘자료 부족으로 판정불가’가 7명이 나왔다. 조사대상 361명 가운데 104명은 사망했다. 


조사결과 ‘거의 확실’이나 ‘가능성 높음’으로 나온 사람은 대부분 의료비(실비)와 장례비를 지급받았다. 하지만 ‘가능성 낮음’이나 ‘거의 없음’으로 판정된 이들은 보상에서 제외됐다. 환경부 보건정책과 황순옥 주무관은 “질병관리본부에서 실시한 동물실험과 역학조사로 나온 결과이기 때문에 (가능성 없음 등의 판정을 받은 경우) 지원은 힘들다”고 말했다. 


정부 조사와 등급 결정에 피해자들 반발 


그러나 이씨는 “폐 뿐만 아니라 기관지 등 다른 쪽으로 피해가 갔을 수도 있는데 폐만 한정지어 검사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반발했다.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을 때 대표적인 부작용이 폐 섬유화 증상인 것은 맞지만 폐 이외에도 호흡기계질환, 안과질환, 피부질환, 심장질환 등 다양한 피해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게 이씨 등 피해자들의 주장이다. 


“비커에 깨끗한 물이 있습니다. 여기에 스포이드로 잉크를 한 방울 넣든, 아니면 잉크를 붓든 물이 더러워지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요? 3등급이든, 1등급이든 그리고 폐 질환이든 다른 질환이든 가습기 살균제 때문에 피해를 본 건 분명한 거잖아요.” 


가습기살균제피해자대책모임 백승목(42․회사원) 총무는 격앙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백 총무는 “기업이 일부러 우리를 죽이려고 살균제를 만들진 않았겠지만 피해가 발생한 만큼 사후보상을 제대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기업이 살균제를 만들었고 정부가 이를 판매하도록 허가해줬는데 피해 보상이 이뤄지도록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데 대해서도 불만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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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은 홈페이지를 만들어 국회에 계류 중인 특별법 통과와 가해기업 처벌을 재차 촉구하고 있다 / 사진=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및 가족모임 홈페이지]
 

가습기 살균제가 폐 이외 기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과학적 근거는 아직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았지만 당사자들은 실제 피해가 발생한 만큼 정부가 나서서 인과관계를 밝혀줘야 한다는 입장이다. 환경부의 황 주무관은 “가습기 살균제가 폐 이외 다른 장기에 영향을 미쳤다는 명확한 연구는 없지만 피해자들의 주장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다”고 인정하면서 “9월부터 서울아산병원과 연세대병원을 중심으로 가습기 살균제가 다른 장기 등에 영향을 주고 합병증을 일으켰는지를 추가 연구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올해 결과가 안 나오더라도 내년부터는 피해를 입은 분들에 대해 정부 지원도 하면서 추가로 건강모니터링도 같이 진행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건강모니터링의 경우도 4등급(가능성 없음)은 여전히 제외된다. 


물론 이번 사건의 1차 책임자는 옥시레킷벤키저, 애경 등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한 회사들이다. 다만 이들 회사를 대상으로 한 피해자들의 소송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국회가 국가의 긴급 지원을 요구해 조사와 보상 등이 먼저 이뤄졌다. 문제는 정부가 지원금 회수가능성이 높은 대상, 즉 ‘폐 섬유화’가 확실한 환자에 한정해 보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나머지 피해자들이 답답함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제대로 된 사과 없이 보상기금 내놓겠다는 제조사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살균제 제조회사들이 제대로 된 책임 인정과 사과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피해자들은 특히 분노하고 있다. 살균제 ‘옥시싹싹’ 제조사인 영국계 옥시레킷벤키저('RB코리아'로 개명)의 대표 샤시 쉐커라 파카는 우리나라 국회의 출석요구를 몇 차례 거부하다 지난해 11월 1일 환경노동위원회에 나왔다. 그는 "지원을 필요로 하는 개인 및 가족들을 위해 50억원 규모의 지원기금을 인도적 차원에서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끝내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고 피해자들에게 사과도 하지 않았다. 아직 판결이 나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현재 제조사를 상대로 개별소송을 낸 피해자는 30~40명으로, 전체 피해자의 10% 정도다.  


가습기 살균제로 건강과 직장을 다 잃은 이씨는 “피해보상책은 오히려 2차 문제고 1차로 중요한 것은 제조회사로부터 제대로 된 사과를 받는 것”이라고 말했다. 시민단체인 환경보건시민센터 최예용 소장은 “50억원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볼 수는 없지만 기업이 진심으로 사과하고 잘못했다는 대답을 끌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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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국회 정문 앞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가족이 일인시위를 하고 있다. / 사진=이모씨 제공]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및 가족모임은 지난 6월 11일 ‘제대로 된 사과 없이 내놓은 기부금 50억을 거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성명에서 “옥시는 기부 이전에 피해자들에게 진정으로 공식사과를 해야 하고, 현재 진행 중인 옥시 관련 재판에 대해 옥시 기금이 어떠한 영향을 끼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공식적으로 보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살균제 제조회사 중 롯데마트, 애경, 홈플러스 등 다른 기업들은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어떤 보상책도 마련하고 있지 않다. 애경 홍보팀은 <단비뉴스>와의 통화에서 “아직 판결이 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식적인 입장을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답했다.


지난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새정치연합의 장하나·홍영표·이언주 의원과 진보정의당 심상정 의원 등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구제 법률안을 발의했다. 환경부 산하에 가습기살균제피해대책위원회를 만들고 정부출연금과 살균제 제조판매업자의 기부금으로 피해구제기금을 마련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기획재정부는 법안 통과에 힘을 보태기는커녕 당초 책정했던 107억원의 피해구제 예산 중 30억원을 삭감하는 등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공개적으로 알져진 지 3년째인 8월 31일을 맞아 피해자와 가족모임은 살균제 제조회사 처벌과 특별법 제정 등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지난달 25일부터 이어가고 있다. 지난 3월 조사 이후 92명이 추가로 정부에 조사 신고를 해, 현재 피해자수는 453명으로 늘었다. 이들은 3일 서울 대학로 환경보건시민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회에 계류 중인 특별법 통과와 가해기업 처벌을 재차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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