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분통, 그보다 큰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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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분통, 그보다 큰 의문

최예용 0 3356

[녹색세상]절망, 분통, 그보다 큰 의문

경향신문 2016년 5월12일 이필렬 칼럼

 

가습기 살균제 사고가 내 안에서 일으키는 감정은 절망·분통·의문 세 가지다. 절망과 분통도 크지만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의문이다. 의문은 여러 갈래로 나뉘지만, 핵심은 왜 이제 와서 검찰, 언론, 정치권, 시민단체 그리고 일반 국민들이 크게 관심을 보이느냐다. 이미 2011년에 가습기 살균제가 치명적이라는 사실이 확인됐고, 그 후 해를 거듭할수록 확정된 사망자 수가 늘어나 수백명에 달했어도 지금까지 반응은 미지근했을 뿐이다.

 

정부는 책임회피에 급급했고, 검찰은 미필적고의에 의한 살인과 유사한 사건 수사를 외면했고, 언론에서는 세월호 사건보다 더 심각할 수 있는 이 사고를 몇 줄로 다루었을 뿐이며, 정치권에서는 사회적 주목을 받지 못한다는 이유로 관심을 보이는 시늉만 했을 뿐이다. 우리 사회의 수많은 시민단체도 환경보건시민센터 한 곳을 빼고는 그다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25년 전 낙동강 페놀 유출사건 때는 두산 회장과 환경부 장차관을 몰아낼 정도로 활발했던 환경단체들도 대부분 적극적이지 않았다. 이제 사건이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게 돼서야 불매운동에 나서는 정도이다. 진보를 자처하는 지식인들도 대부분 침묵으로 일관했다. 세월호 사고와 메르스 사태 때와는 너무나 다른 태도를 보였다. 그때는 사고가 터지자마자 의견이 봇물처럼 쏟아져나왔지만, 가습기 살균제 사고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는 물론 지금도 거의 말이 없다.

가습기 살균제 사고가 이제 와서 폭발적인 관심을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촉발은 검찰의 본격적인 수사에서 시작됐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검찰에서 갑자기 제조자, 판매자, 원료공급자, 독성연구자 등을 대상으로 광범위한 수사에 들어가자 언론에서 크게 보도하고, 정치권에서 특별법, 특별조사위, 청문회 이야기를 내놓고, 시민단체들이 불매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아마 많은 관련자들이 감옥에 갈 것이고, 관련 회사들이 타격을 입을 것이고, 국회에서도 활발한 조사와 법 제정이 이루어질 것이다. 사건이 정부 고위층과 관련이 없으니 처벌은 꽤 엄정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이 피해자와 유가족들에게는 약간의 위로가 될 것이다. 

그렇게 마무리된다 해도 왜 그동안은 미지근했을까의 답은 찾아야 한다. 이 의문이 풀리지 않으면 앞으로 절망과 분통을 일으킬 일은 계속될 것이다. 가습기 살균제 사고는 물론이고 메틸알코올 실명, 수은 중독 같은 크고 작은 사고가 반복될 것이다. 의문의 답은 아마 우리 사회의 ‘현재 집착성’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지금 눈앞의 이익, 사건, 사고에 대해서만 크게 반응하는 것을 ‘현재 집착성’이라고 부른다면, 가습기 살균제 사고에 대한 지금 우리 사회의 반응도 바로 그 결과다. 많은 사람이 형사처벌을 받게 됐고, 이를 통해 수백명이 사망했다는 사실이 부각된 지금에 와서야 큰 관심을 보이는 것을 어떻게 달리 설명할 수 있겠는가. 

‘현재 집착성’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당장 생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는 안된다. 지금을 넘어 긴 시간을 설계할 줄 아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기는 어렵다. 몇 년 지나면 선거를 치러야 하는 정치인도, 현재의 사건·사고에 집중해야 하는 언론도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사회를 이끌어간다는 부류의 사람들, 특히 더 나은 미래를 지향하는 진보 지식인들은 그런 능력을 가져야 한다. 획득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세월호, 메르스 때와 대조되는 가습기 살균제 사고에 대한 진보 지식인들의 무관심을 보면 이들도 ‘현재 집착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검찰에서 원료제조사까지 수사한다고 한다. 처벌은 못하겠지만 이참에 가습기 세균이 위험하고 살균제를 쓰는 게 좋다는 말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도 조사해서 발표하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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