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늬만 ‘민간’인 원전감시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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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만 ‘민간’인 원전감시기구

최예용 0 13117

얼마 전 우리 농장에서 방사능 측정에 관해 의미있는 모임을 가졌다. 영광의 원전6호기가 고장으로 멈춰 섰다는 뉴스를 접한 서울의 한 회원이 자신이 알고 지내는 우크라이나 핵물리학 박사의 사위를 데려와 방사능 측정을 하고 싶으니 이쪽에서도 준비를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영광지역 탈핵공동행동이라는 민간조직의 상임이사로 원전6호기 사건과 관련하여 이미 군수와 원전감시센터의 소장을 만난 바 있어 이참에 내가 사는 지역의 방사능 측정을 해보는 것도 좋은 듯 싶었다.

약속한 날이 되자 우크라이나 핵물리학 박사의 사위는 우크라이나에서 제조한 방사능 측정기를 들고 오고, 영광원전민간감시기구에서는 자기네가 보유하고 있는 미국제 측정기를 들고 나타났다. 모두 네 종류의 기기를 가동했는데 측정결과는 대동소이했다. 다만 이곳이 산속이라 고도가 높아서 평지보다 측정치가 다소 높게 나왔는데 이는 자연방사능 수치라고 한다. 우크라이나는 체르노빌 원전사고를 겪은 뒤 국가차원에서 간편한 방사능 측정기를 만들어 저렴한 가격으로 민간에 보급하고 있었다. 이날 온 분은 그 제품을 소개하고자 이 먼 곳까지 온 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기기를 가까이서 살펴본 결과 비싼 미국제보다 우크라이나 제품이 값도 싸고 성능도 훨씬 좋아 보였다.

 

 

 


그동안 원전사고가 나면 국민들은 뭐가 어찌 돌아가는 줄 몰라 앉아서 정부의 발표만 듣고 있었으나 작년 후쿠시마 사고 이후 스스로 안전을 챙기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100% 안전하다는 정부말만 믿고 있다가 어이없는 사고를 당하고 나니 더 이상 정부를 신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그동안 전문연구기관에서나 찾던 방사능 측정기에 대한 수요가 민간인 사이에서도 늘어나는 추세에 있다. 이번에 우크라이나 제품이 한국에 온 것도 그러한 추세와 무관하지 않다. 아직은 규모가 큰 환경단체에서 한두 대 구입하여 운용하고 있는 정도이나 가격이 좀 더 내려가면 누구든지 손에 들고 다니면서 방사능 측정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일반 국민이 스스로 방사능 측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원전의 안전문제가 더 이상 전문가만의 영역이 아님을 말해 준다. 사실 방사능이란 것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데다 피폭의 증상이 서서히 나타나기 때문에 특별히 예민한 사람이 아니면 알 도리가 없다. 게다가 원전은 군사시설 이상으로 엄격히 통제관리되고 있어 민간인의 접근이 원천적으로 차단된 곳이다. 그러나 잇단 원전 고장과 방사능 누출 사고로 불안해 하던 영광 군민들은 지난한 반핵투쟁을 통해 1999년에 ‘영광원전민간감시기구’라는 가시적인 성과를 만들어낸다. 이후로 원전이 있는 다른 네 곳의 지자체에도 비슷한 민간감시기구가 속속 들어선다. 하지만 위원장과 운영위원장이 군수와 군의회 의원으로 되어있어 이름만 민간감시기구이지 정부의 직접 통제 아래에 있는 정부기관이나 다름이 없다.

물론 모든 예산이 정부에서 나오니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지만 정부돈이란 것이 결국은 국민의 세금 아닌가? 정부가 다 알아서 한다면 굳이 민간감시기구 같은 것을 만들 이유도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해 위원장인 군수와 감시센터 소장은 정부와 주민의 중간에 끼여 곤란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라고 고충을 토로한다. 감시기구에서 실시하는 대민홍보와 교육이란 것도 대체로 공기관의 업무달성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조직의 상부를 공무원이 장악하고 있는 기구에서 주민친화적인 사업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우리는 감시기구의 위원장만은 자격 있는 민간인이 맡도록 조례를 개정해야 한다고 강력히 요구한다. 그리고 운영위원도 지방의 유지들이 돌려먹기 식으로 하지 말고 진정으로 원전의 안전에 관심을 갖고 있는 지역인사들을 골고루 참여시켜야 한다. 그렇게 못하겠다면 이름에서 ‘민간’을 떼어내던가.

황대권, 야생초편지 저자

이글은 경향신문 2012년8월16일자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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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2011년11월9일 가습기살균제 문제대책촉구 사회인사 기자회견에 참석한 황대권선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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