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숨이 안 쉬어져’ 29]인도 보팔 참사 33년, 한국에 주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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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숨이 안 쉬어져’ 29]인도 보팔 참사 33년, 한국에 주는 교훈

최예용 0 3269
[‘엄마, 숨이 안 쉬어져’]인도 보팔 참사 33년, 한국에 주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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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팔 참사는 글로벌 경제에서 강자와 약자의 극심한 불균형, 그 중에서도 비용을 삭감하려는 다국적 기업과 투자를 유치하려는 인도 정부의 경제적 이해관계로 발생한 기업 범죄다. 이러한 특징은 피해자들이 기업의 생색내기용 보상조차 받기 힘들게 만들었다. 이는 가습기 살균제 참사 피해자들의 상황과도 유사하다.


한국의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의 원폭 피해,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의 원자력 발전소 사고, 미나마타병, 인도 보팔 가스 참사, DES와 탈리노마이드로 인한 의약품 참사 등을 잇는 대규모 기술재난이다. 세계 각지에서 발생했으며 그 원인과 양상도 각기 다르지만, 과거의 재난은 현재 한국 사회가 마주한 ‘가습기 살균제 참사’라는 중대한 과제에 대해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올해 33주년을 맞은 인도 보팔(Bhopal) 가스 누출 참사에 대해 주목하고 싶다. 

3000여명 목숨 앗아간 독성물질 누출 

1984년 12월 3일, 보팔에서는 비극적인 가스 누출 사고가 있었다. 그날 자정, 미국계 다국적 대기업 UCC(Union Carbide Co.)의 현지 자회사 UCIL(Union Carbide India Ltd.) 보팔 공장의 탱크에 문제가 생겨, 농약과 살충제 제조에 사용되는 독성 화학물질 MIC(메틸이소시안산염)가 인근 40km2로 퍼져 나갔다. 때는 모두가 잠든 새벽이었고, 공장에서 경보를 제대로 울리지 않아 하룻밤 사이에만 약 3000명이 사망했다. UCC는 사고 원인을 현지인 직원의 근무태만과 사보타주로 돌렸지만, 비용 절감을 위해 미국의 자매공장에 훨씬 못 미치는 안전 기준으로 보팔 공장을 운영해왔던 사실이 머지않아 밝혀졌다. 안전조치를 줄이고 관리 인력을 해고하면서 참사 이전부터 이미 크고 작은 사고가 발생했던 것이다. 또 근처에 도시 빈민들이 주로 거주했고, 인도 정부가 피해 규모를 축소하여 공식화했다는 점 등은 피해자들의 고통을 악화시켰다. 1989년 인도의 최고법원은 인도 정부와 UCC 사이에 4억7000만 달러의 배상금을 지불하되 UCC의 모든 민·형사상 책임을 면제한다는 화해를 승인했다. 이는 피해 규모에 비해 터무니 없는 금액이었지만, 이미 합의했다는 이유로 UCC는 이후 추가배상을 하지 않았다. UCC를 인수한 다우케미컬(Dow Chemical)도 같은 태도를 고수하고 있어, 최근에도 생존자들은 보팔 참사를 기억하고 알리며 정부와 기업에 여전히 책임과 배상을 촉구하고 있다.

인도 방갈로르에서 2일 보팔 참사 30주년을 맞아 학생들과 시민운동가들이 진상규명과 보상을 요구하는 촛불시위를 하고 있다. 1984년 12월 2일 밤 인도 중부 보팔에서 미국 화학기업 유니온카바이드 공장 폭발사고가 일어나 독극물이 누출돼 2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으나 아직까지 보상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유니온카바이드는 2001년 다우케미컬에 인수됐다. / AP연합뉴스

인도 방갈로르에서 2일 보팔 참사 30주년을 맞아 학생들과 시민운동가들이 진상규명과 보상을 요구하는 촛불시위를 하고 있다. 1984년 12월 2일 밤 인도 중부 보팔에서 미국 화학기업 유니온카바이드 공장 폭발사고가 일어나 독극물이 누출돼 2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으나 아직까지 보상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유니온카바이드는 2001년 다우케미컬에 인수됐다. / AP연합뉴스


보팔 가스 참사는 가습기 살균제 참사와 마찬가지로 살생물제(biocide)에 의한 재해일 뿐만 아니라, 글로벌라이제이션을 배경으로 한 공해수출(pollution export)의 대표적인 사례다. 공해수출이란 오래된 제조설비, 유해물질을 취급하는 공장, 그리고 폐기물과 같은 오염물질을 선진국에서 개발도상국으로 이전시키는 국가 간 교역행위를 일컫는다. 공해수출이 가능한 이유는 이중기준(규제)인데, 이는 선진국의 안전 및 환경 규제가 수입국인 개발도상국에서 지켜지지 않고 있는 이중성을 뜻한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의 경우, 옥시레킷벤키저를 포함한 해외의 다국적 기업들이 유럽과 미국의 화학물질규제법에 따르면 (해당 용도로) 사용하지 못했을 독성물질들을 흡입 가능한 가습기 살균제에 사용했다. 보팔 가스 참사에서 이러한 이중규제는 다국적 대기업에 대한 지역 빈민들의 지난한 투쟁인 ‘세상에서 제일 빈곤한 사람들과 제일 부유한 사람들의 싸움’으로 이어졌다.

필자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의 경험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20세기 최악의 화학물질 누출 참사인 보팔 가스 참사와의 비교가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새롭게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거라 생각했다. 필자는 지난 2월 인도 보팔 현지 답사를 다녀왔다. 일주일간의 답사 동안 보팔 가스 참사 생존자 및 활동가들을 만나 재난이 어떻게 그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는지, 또 이들이 국가와 기업에 어떻게 투쟁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2017년 보팔과 보팔 참사가 남긴 유산 

33년의 세월. 3시간 30분의 시차. 인천에서 보팔까지 11시간 남짓의 비행. 이것이 보팔과 필자 사이의 거리였다. 책과 논문에서만 봤던 보팔 가스 참사의 현장에 간다고 생각하니, 약 11시간의 비행이 마치 33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여행 같았다. 

생존자와 운동가들에게 재난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고, 그들의 삶은 보팔에서 계속 되고 있었다. 필자가 보팔에서 만난 생존자와 운동가,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계속되고 있는 재난’에 대해 증언했다. 참사, 그리고 피해자들의 상처와 고통은 왜 봉합되지 못하고 계속되고 있는가? 그 이유 중 하나는 UCIL이 1984년 이전부터 지역 곳곳에 매립한 유독성 폐기물이었다. 매립된 폐기물로 인한 식수 오염 문제는 1999년에 드러났지만, 사측은 현재까지도 폐기물 매립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가스 참사 피해자를 위한 정부 설립 병원에서도 식수 오염으로 인한 환자들은 대상으로 하고 있지 않아 주민들의 고통은 가중되고 있다. 사고가 있었던 공장 현장과 유독성 폐기물 철거 및 정화작업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 가스 직접 노출 세대가 아니어도 피해를 받고 있다는 점, 임의적인 판정 기준, 그리고 보상금의 액수에도 적용된 선진국과의 이중잣대 때문에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보상 등으로 인해, 참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가운데에도 재난으로 인한 고통을 치유하고,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해 힘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보팔에서 방문한 곳 중 필자가 특히 주목했던 삼바브나 트러스트 클리닉(Sambhavna Trust Clinic)과 보팔 추모 박물관(Remember Bhopal Museum)은 바로 그러한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이었다.

1996년 설립된 삼바브나 클리닉은 생존자의 치료 및 재활을 돕는 민간 병원이다. 이 병원은 기부를 통해 운영되는 위탁사업체로, 의사, 과학자, 작가, 그리고 운동가들이 힘을 합쳐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 등록된 약 2만9000명의 피해자들은 서양의학, 인도 전통의학, 그리고 요가 테라피 등의 치료를 무료로 받고 있다. 가스뿐만 아니라 식수 오염으로 인한 환자들도 무료로 진료한다거나, 단순히 일회적인 약 처방에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피해자를 발굴하고 이들의 건강 변화를 데이터화하고 있다. 삼바브나 클리닉은 보팔 추모 병원 및 연구센터(Bhopal Memorial Hospital & Research Centre, 이하 BMHRC) 등 가스 참사 피해자들을 위한 정부 설립 병원의 한계를 비판, 보완하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의 경우에도 대규모 역학조사 등을 통해 현재보다 더 적극적으로 피해자들을 찾아내는 한편, 피해자들의 만성적인 질환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치료할 수 있는 지원책이 요구된다. 인도 보팔은 한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피해 지역과 정부 설립 병원 간의 거리가 피해자들의 접근을 어렵게 했다. 한국의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은 전국에 산발해 있기 때문에 훨씬 더 세밀하고 장기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를 위한 환경보건센터의 운영에 있어 피해자의 목소리가 반영될 수 있고, 이를 통해 비판과 보완이 가능한 체계가 갖춰져야 할 것이다. 

보팔 추모 박물관은 참사 30주년을 맞아 2014년 설립되었고 후원금만으로 운영되고 있다. 박물관은 총 4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방에서는 생존자들이 모은 유품과 함께 벽에 설치된 수화기로 생존자들과 활동가들의 녹음된 목소리로 직접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참사 당일과 직후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어둠의 방’부터, 이후 세대의 고통을 절절하게 보여주는 ‘아이들의 방’, UCC와 정부의 무책임함과 기만을 고발하는 ‘배상의 방’, 총리에게 책임과 지원을 촉구하면서 보팔부터 델리까지 도보행진한 2006년의 기록을 담은 ‘운동의 방’까지, 참사 이후 계속되어온 투쟁의 역사가 펼쳐졌다. 이 박물관은 인도 최초의 구술사 박물관으로서 산업재해 박물관이자, 생존자들의 관점에서 그들의 역사를 재현한 기록관으로서 매우 상징적이다. 정의를 실현하고, 피해자들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것뿐만 아니라, 누구의 관점으로 재난이 기억될 것인지가 중요한데, 보팔 추모 박물관은 생존자들의 노력이 거둔 작은 결실이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의 경우, 2011년 질병관리본부의 역학조사 결과 가습기 살균제의 정체가 세상에 드러난 이후 6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보팔 참사를 비롯해 세계의 유사한 재난들을 보았을 때,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아직도 사건의 ‘초기’에 해당한다. 피해자 수습,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가습기 살균제 참사에 대한 기억을 제대로 수집하는 작업은 이루어진 바가 없지만, 가습기 살균제 참사의 ‘해결’은 아마도 몇십년 후에 이 참사가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수적으로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 33년 후를 상상하며 

정보 부족과 소통 단절은 보팔 가스 참사를 더욱 풀기 힘든 난제로 만든 주범이다. UCIL 공장의 노동자들은 MIC의 위험성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였으며, 공장 바로 옆에 판자촌을 짓고 살던 도시 빈민들도 자신이 어떤 잠재적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이러한 무지의 위험성은 사고 직후 참사의 규모를 증폭시켰고 그 여파는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래서 보팔 가스 참사가 남긴 큰 유산은 세계적으로 일어난 알 권리(right-to-know)법 제정 운동이었다. 즉, 보팔 참사는 세계 사회에 유독물질로 인한 산업재해의 심각성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1986년 미국에서는 소위 ‘알 권리 법’으로 알려진 ‘비상사태 계획 및 지역사회 알 권리에 관한 법’(Emergency Planning and Community Right to Know Act, EPCRA)이 통과되었다. 이 법은 화학물질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비상대응관리책을 마련하고, 수집된 정보를 지역주민들에게 공개하여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 내 위해를 인지하도록 한다. 또한 연간 4.5t 이상 유해물질을 취급하는 10인 이상 사업장은 모두 보고하도록 의무화했다. 미국에 이어 캐나다와 호주 등지에서도 유사한 법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미국계 기업이 해외에 진출했을 경우에는 이러한 의무를 부과하지 않는다는 큰 한계가 있다.)

알 권리는 최소한으로 꼭 보장되어야 할 권리이지만, 이것이 비슷한 재난의 반복을 막을 수는 없다. 가령 현재 보팔 구시가지의 빈민들은 자신이 마시는 물이 신체에 가져올 영향에 대해 알고 있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기에 계속해서 그 물을 마시고 병원을 가기를 반복한다. 같은 맥락에서 일각에서는 보팔 참사를 보다 근본적 차원에서 기술, 지식, 권력의 관계에 대한 숙고를 다시 촉구하는 계기로 삼고자 했다. 저명한 과학기술사회학자인 쉴라 재서노프(Sheila Jasanoff)는 보팔 참사가 “기술의 실패가 아닌 지식의 실패”라 규정했다. 그녀는 MIC에 관해 가능한 정보와 UCC 안팎으로 이 정보가 소통되는 과정에서 굉장한 정보 격차가 있었다고 지적하고, 알 권리 정책의 핵심적 과제는 특히 이러한 기술 이전에서 정보 격차의 해소 방법이 될 것이라 예상했다. 또 재서노프는 애초에 기술에 관한 의사결정에서 노동자, 일반 시민, 공무원 등의 다양한 이해관계가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보팔 가스 참사의 교훈이 알 권리에 대한 협소한(법적 차원에만 국한된) 논의가 되어선 안된다고 보았다.

보팔 참사는 글로벌 경제에서 강자와 약자의 극심한 불균형, 그 중에서도 비용을 삭감하려는 다국적 기업과 투자를 유치하려는 인도 정부의 경제적 이해관계로 발생한 기업 범죄다. 이러한 특징은 피해자들이 기업의 생색내기용 보상조차 받기 힘들게 만들었다. 나아가 피해자들의 치료와 생계를 어렵게 했고 회복하기 힘든 모욕감을 주었다. 이는 가습기 살균제 참사 피해자들의 상황과도 유사하다. 필자가 보팔에서 만난 생존자와 운동가들도 한국의 가습기 살균제 참사에 큰 관심을 보이며 연대의 뜻을 전했다. 이들의 말로부터 교훈과 희망을 대신 전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겠다. 


삼바브나 클리닉의 사서 샤네즈(Shahnaz): “당신의 권리에 대해 알아야 한다. 연대해서 싸운다면 이기지 못할 리 없다.” 샤네즈는 다국적 기업의 임원이나 정부의 관료들은 안전시설 미비로 인한 위험에 영향을 받는 당사자가 아니라고 꼬집었다. 그녀는 바로 이러한 점에서 왜 보팔 참사가 단지 장비와 기술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불공정의 문제이자 정치적인 과제임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도 마찬가지로 단지 유해화학물질에 대한 관리 실패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정치적인 문제이며, 이러한 논의를 계속 풍부하게 만드는 것이 피해자 운동의 장기적인 동력이 될 것이다.

 
보팔 추모 박물관의 큐레이터 수레쉬(Suresh) : “기억하는 것도 일종의 저항이다.” 33년의 세월 동안 보팔 참사의 피해자들과 운동가들은 참사의 이야기를 누구의 관점에서 어떻게 기억, 기록하는지의 중요성을 인지해왔고, 그 결과 이 박물관이 탄생했다. 생존자들은 정의를 위해 노력하지 않은 인도 정부는 희생자들을 추모할 도덕적 권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정부로부터의 ‘top-down’으로 형성된 기억을 거부하고, 이질적이더라도 생존자들의 기억과 생각을 담는 박물관을 지었다. 이렇게 피해자의 관점으로 재난을 바라보고 또 그 기억을 잊지 않고자 노력하는 것은 같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도덕적 의무가 아닐까? 

<김지원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대학원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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