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회 성명서] 가습기살균제참사 특별법 전부개정법률의 개선과 전향적 후속조치를 촉구한다
환경․보건 분야 7대 학술단체 공동 성명서
가습기살균제 참사 국가배상체계 전환,
의미와 향후 과제
특별법 전부개정법률의 개선과 전향적 후속 조치를 요구한다
대한민국 역사상 유례 없는 환경보건 참사인 가습기살균제 건강피해 사건이 확인된 지 약 15년이 지났다. 그동안 피해자들의 절박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피해구제는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했고, 많은 피해자와 가족들은 깊은 고통과 좌절을 겪어야 했다.
정부는 가습기살균제 건강피해를 사회적 참사로 규정하고 총리실 주도의 후속 조치를 추진하는 한편, 국가배상체계로의 전환을 선언하였다. 우리나라 환경․보건․사회 분야를 대표하는 7대 학술단체는 뒤늦게나마 이루어진 정부의 전향적 조치와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한 특별법 전부개정법률」(이하 「특별법 전부개정법률」)과 정부의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이제 가습기살균제로 인해 건강 피해를 입은 모든 피해자에게 합당하고 실질적인 배·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십수년 동안 지속되어 온 기업과 국가의 책임 회피와 제도적 한계로부터 초래된 개인적 고통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는 기회이다. 「특별법 전부개정법률」의 시행과 시행령 제정 등 일련의 후속 조치를 철저히 하여 국가가 환경 유해요인으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모범적 선례가 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특별법 전부개정법률」 이 피해자에게 실질적인 배상과 회복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제도 운영 과정에서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가 남아있다. 우리 학술단체의 전문가들은 이 법이 대통령이 천명한 '온전한 배상'과 '국민의 생명과 안전 보호'를 제대로 구현하고 그간의 시행착오와 고통이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특별법 전부개정법률」에 드러난 다음의 문제점에 대해 다음과 같은 과제를 제안한다.
배·보상 신청 기간에 문제가 있다.
가습기살균제 성분으로 인한 건강 영향은 급성 폐질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다수의 연구에서 살생물제 노출의 전신 독성과 만성적 후유 질환과의 연관 가능성이 지속적으로 보고되고 있다. 1950년대말 발생한 탈리도마이드 건강 피해자에 대한 배·보상이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사례를 잊지 말아야 한다. 환경 노출로 인한 건강 피해 잠복기가 길고 만성 합병증이 발생할 가능성이 큰 경우가 드물지 않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특별법 전부개정법률」 제12조의 6개월 제한조항은 심각한 우려를 야기한다. 신청 기한을 6개월로 제한함으로써 잠재적 피해자의 권리 행사를 사실상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종국성' 원칙은 피해자의 권리를 외면하는 미봉책이다.
가습기살균제는 1994년에 세계 최초로 개발 출시되어 2011년까지 18년간 50여종 1천만 개가 판매되었고, 2011년 사건이 알려진 이후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피해신고가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과거에 피해인정을 받지 못했거나, 불충분한 정보와 과학적 지식에 근거한 합의나 재판상 화해가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향후 새롭게 발생할 수 있는 추가 질환에 대한 배·보상 청구 권리까지 제한하는 '종국성' 원칙은 피해자의 권리를 심각히 제한한다. 또한 '모니터링 2회 불참시 탈락'과 같은 배제 원칙을 모법에 명시함은 환경성 질환의 특성을 고려하지 못한 행정편의주의적 발상을 드러낸다. 이는 피해자의 권리를 제약하면서 서둘러 마무리하려는 '미봉책'이라는 비판을 받을 우려가 크다.
합리적 배·보상 기준이 없다.
과학적으로 타당하며 피해자가 동의할 수 있는 배상기준이 없다면 「특별법 전부개정법률」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정부는 그동안 피해자의 노출과 질환에 대한 정보를 포괄적으로 수집해왔지만 피해 구제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 형성과 기준 마련에 실패해 왔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그동안 수집된 국가자료를 이해당사자에게 공개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그동안 환경부와 사회적참사위 등 정부기관은 가습기살균제 사용자와 피해자의 예상범위, 피해신고자들의 노출특성과 질환 현황 등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수집해왔다. 그러나 이 국가자료가 그동안 가습기 살균제 건강 피해의 범위와 원인을 규명하는데 적극적으로 활용되지 않았다. 배상기준의 마련 시기와 합리적 도출 방법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는 한, 조만간 온전한 배상이 시작될 거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더 이상 억울한 피해자가 생겨서는 안 된다.
환경보건 참사는 노출과 질환 간의 직접적 인과관계를 개별적으로 입증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가습기살균제 참사가 오늘까지 해결되지 못했던 주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참사 피해의 규명을 위해 의학적 인과성과 법적 인과성 입증을 과도하게 요구함으로써 문제의 해결을 지연시켜왔던 것이다.
가습기살균제 배상 심의위원회(이하 '심의위원회') 관련 조항(「특별법 전부개정법률」 제7조)에 우려를 표한다. 법률, 의료, 행정 분야 전문가 중심의 심의위원회 구성과 운영만으로는 온전한 문제 해결에 가까워질 수 없다.
이에 우리 학술단체의 전문가들은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향후 정부의 전향적이고 책임 있는 법적, 행정적 후속 조치를 촉구한다.
1. 배·보상 신청 기간을 합리화하라.
가습기살균제 노출로 인한 만성 후유 질환의 장기 추적 의무를 하위 법령에 담아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피해까지 관리해야 한다. 「특별법 전부개정법률」 제12조의 6개월 제한조항을 개선하라. 「특별법 전부개정법률」 제12조 제2항의 '특별한 사유' 규정에 후유 및 추가 발생 질환 등을 명시하여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후속 피해에 대해서도 온당한 책임을 다하여야 한다.
2. 피해자를 적극적으로 찾아 장기적으로 모니터링하라.
「특별법 전부개정법률」 제12조 및 제22조의 '손해배상금을 받으려는 자'와 건강모니터링 대상자의 범위를 현재 시점의 피해자와 노출확인자로만 국한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조치는 공식 확인 과정에서 누락되었거나 향후 나타날 새로운 피해자 등 잠재적 피해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이제라도 피해 가능 인구를 추적하여 피해자를 찾아내고 장기적인 모니터링을 통해 미래의 피해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다하려는 국가의 노력이 필요하다.
3. 전문가 집단과의 정보 공유와 이해당사자와 소통을 상시화하라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온전한 해결이 지연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제한된 정보 공유와 소통의 부재에 있다. 역학조사와 연구용역 결과는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았고, 전문가와 이해당사자의 참여도 충분히 보장되지 않았다. 이는 결국 정부 대응의 신뢰성을 저하시켰고, 피해 인정 범위 등에 대한 불필요한 사회적 논란을 자초했다.
이제부터라도 정부는 전문가 집단과 이해당사자와의 소통을 제도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특별법 전부개정법률」 제7조에 근거한 전문위원회를 상설화하여 전문가 집단에 대한 투명한 정보공개 및 이해당사자 간의 상시적 소통을 제도화해야 한다. 관련 국가자료를 피해자 단체가 추천한 전문가를 포함한 전문가 집단과 투명하게 공유하라. 전문가 집단과의 상시적 협력을 통해 질환의 중증도, 발병 연령, 경제적 손실 등을 종합한 과학적 배·보상 체계와 기준을 시급히 마련하라.
4. 심의위원회 구성을 합리화하라.
환경보건 참사에 대한 법적 인과성 추정에는 현대 보건학 및 역학의 과학적 지식이 반드시 반영되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법률, 의료, 행정 분야 전문가 중심의 심의위원회만으로는 문제 해결에 한계가 있다. 심의위원회에 보건학, 역학, 독성학, 노출과학 등 밀접히 관련된 분야의 전문가를 포함하고 피해자 단체에 전문가 추천 권한을 부여하라.
5. 기업의 과실에 따른 처벌과 사회적 책임을 강화하라.
「특별법 전부개정법률」을 통해 국가는 참사의 공동 가해자로서 늦었지만 그 책임을 지기 시작했다. 이는 우리 사회가 나누어 떠맡아야 하는 온당한 책임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참사의 일차적 원인은 가습기살균제 제품 개발과 살균제 공급 기업의 과실에 있다. 그동안 관련 기업은 과학적 사실로 드러난 관련성을 부정하고 수사를 회피하는가 하면, 1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추진된 사적 조정에서도 책임을 회피해 결국 무산시킨 바 있다. 이번 「특별법 전부개정법률」이 기업이 온당히 맡아야 할 과실에 대한 법적․사회적 책임을 분명히 하고 이에 합당한 배·보상 참여를 의무화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가습기살균제 참사 피해자의 고통이 반복되고 심화되는 비극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이 참사가 우리에게 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이다. 우리 환경 및 보건 분야 학계의 전문가들도 그 책임을 무겁게 느끼며 이 자리에 섰다. 가습기살균제 참사 이후 15년은 커다란 실패와 좌절의 반복이었으며 피해자의 고통은 가중되어 온 비극적 시간이었다. 우리는 정부의 이번 정책이 실효성 있게 추진되어 피해에 대한 합리적인 배상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국가가 더 철저히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킬 수 있도록 주어진 학문적·사회적 책무를 다할 것이다.
2026년 3월 12일
대한예방의학회, 대한직업환경의학회, 한국역학회, 한국환경법학회,
한국환경보건학회, 한국환경사회학회, 환경독성보건학회 (이상 가나다순)
문의: 최경호 한국환경보건학회 회장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 010-9286-877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