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평법 둘러싼 국내 화학업계의 이상한 반발

화평법 둘러싼 국내 화학업계의 이상한 반발

최예용 0 3337

EU기준 잘 지키더니 국내기준 만들자 '으르릉'

2013년8월29일 CBS 노컷뉴스

유럽연합(EU)은 신규화학물질관리규정을 갖고 있다. REACH다. 국내 화학업체들은 REACH에 맞춰 화학제품을 수출한다. 한국에도 REACH와 유사한 법이 발효된다.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이다. 그런데 국내 화학업체들은 이 법의 규제가 너무 심하다면서 볼멘소리를 늘어놓고 있다.

2011년 4월 충남 천안시에 사는 A씨는 3살배기 딸아이가 급성 간질성 폐렴증세를 보이자 인근 종합병원을 찾았다. 하지만 원인은 알 수 없었다. 시름시름 앓던 딸아이는 그해 6월 숨졌다. 그로부터 2개월이 흐른 8월 31일. 보건복지부 질병관리본부는 역학조사를 통해 가습기 살균제가 폐를 손상시킬 수 있다고 발표했다.

앞서 4~5월 산모들에게서 집중적으로 원인미상의 폐질환이 나타나면서 보건당국이 조사에 나선 것이다. 살균제에 포함된 화학물질이 수증기와 함께 공기 중에 퍼지면서 폐를 손상시킨 거였다. 이후 환경보건시민센터는 원인미상의 폐질환이 산모뿐만 아니라 영유아에게도 나타났다며 피해사례를 공개했다.

A씨는 이 발표를 보고 분통을 터뜨렸다. 자신의 손으로 살균제를 넣는 바람에 딸이 죽었다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ㆍ판매했던 업체는 보건당국의 발표를 인정하지도, 피해자들에게 사과나 위로를 하지도 않았다. 제조ㆍ판매를 허가했던 정부 역시 고개를 숙이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이런 사고들은 가습기 살균제에 포함된 화학물질이 어떤 유해성(화학물질 고유의 해로운 성질이나 특성)과 위해성(유해한 화학물질이 노출됐을 때 인체나 환경에 피해를 주는 정도)을 갖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화학물질관리제도에 '구멍'이 뚫렸다는 주장이 나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게다가 유해화학물질 유출사고까지 잇따라 터지면서 이 제도를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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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가 먼저 나섰다. 올해 5월 "화학물질 관련 사고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며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을 통과시켰다. 화학물질을 등록하고, 유해성ㆍ위해성의 심사ㆍ평가를 통해 화학물질을 제대로 관리하겠다는 취지다.

다만 2015년 1월 1일부로 발효된다. 하지만 법이 제대로 발효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다. 시행령 등 하위법령이 언제 만들어질지도 예측하기 어렵다. 일부 화학업체의 반발이 워낙 심해서다.

가장 시끄러운 건 등록규정이다. 화평법에 반발하는 업체들은 "등록 기준이 유럽연합(EU)의 신규화학물질관리규정(REACH)보다 까다롭다"며 "EU와 미국ㆍ호주ㆍ캐나다 등은 신규화학물질을 등록할 때 예외를 인정하는데, 화평법엔 그게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법이 발효되면 적게는 1만여종 많게는 3만여종에 가까운 화학물질을 등록해야 하는데 시간과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거다.

◈ 화평법, REACH보다 강한가

실제 화평법은 "신규화학물질이나 연간 1t 이상 등록대상기존화학물질을 제조ㆍ수입하려는 자는 제조ㆍ수입 전에 미리 등록해야 한다"며 "다만 사람의 건강이나 환경에 심각한 피해를 입힐 우려가 커 환경부장관이 지정ㆍ고시한 화학물질은 제조량ㆍ수입량이 연간 1t 미만이더라도 등록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기존화학물질은 1t 이상 제조ㆍ수입할 경우 이 법에 따라야 한다. 등록 내용에는 해당 화학물질의 명칭ㆍ식별정보ㆍ용도를 비롯해ㆍ물리적ㆍ화학적 특성과 유해ㆍ위해성 등이 포함된다.

일부 언론은 "등록 기간이 오래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들어 화학물질을 사용하는 대부분의 산업들이 경쟁력을 잃을 수 있다"며 "더구나 '화학물질이나 이를 함유한 혼합물 양도자는 양수자에게 해당 화학물질의 등록번호와 명칭, 유해성ㆍ위해성에 관한 정보, 안전사용정보 등을 제공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어 기술이나 영업비밀을 해외경쟁업체에 노출할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화학업계 반응에 대해 '할리우드 액션'이라는 주장이 만만찮다. 심상정(정의당) 의원실의 박항주 보좌관은 "화평법의 위해성 평가 등록항목은 최대 51개로 EU의 규정 REACH(최대 61개)보다 적고, 화평법은 화학물질만 관리하지만 REACH에선 제품에 사용된 화학물질까지 관리한다"며 "등록예외 규정이 없다는 것만으로 REACH보다 강력한 규제라고 하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했다. 박항주 보좌관은 "화평법이 생산속도를 떨어뜨려 기업이 경쟁력을 잃을 수 있다고 하는데, 해외에 화학물질을 수출하는 국내 업체들은 화평법보다 까다로운 REACH를 단 1건도 위반한 적이 없다"고 꼬집었다.

환경부도 황당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황인목 환경보건정책관실 화학물질과 사무관은 "등록에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고 하는데, 사실과 다르다"며 "문제가 되는 건 평가기간 때문인데, 신규물질을 시험해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오래 걸릴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신규물질을 시험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물질 개발과 동시에 등록을 준비하면 별 상관이 없다"며 말을 이었다. "화평법이 EU의 규정보다 강하다고 하는데, 오히려 규정이 느슨한 측면이 더 많다. 화평법은 기존화학물질 등록 기준을 1t 이상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1t 이상은 유통량과 유해성ㆍ위해성에 따라 고시를 하도록 돼 있다. 다시 말해 고시된 물질만 등록한다는 거다. EU의 REACH는 1t 이상이면 전부 등록해야 한다. 등록항목 수 역시 화평법이 적다. 위해성 평가 자료도 REACH는 1t 이상 화학물질에 모두 적용하고 있지만, 우리는 단계적으로 시행하다보니 우선 100t 이상 화학물질에만 적용한다. 더구나 제조ㆍ수입자만 규제하는 화평법과는 달리 REACH는 화학물질 사용자까지 규제한다. 화평법은 REACH보다 약하면 약했지 절대 강하다고 볼 수 없다."

화평법이 영업 비밀을 노출시킬 것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환경법률센터에서 활동 중인 정남순 변호사는 "화평법의 취지는 국민의 건강을 위한 화학물질 위해성평가조사 자료를 제출하라는 게 골자인데, 화학업체들은 엉뚱하게 화학물질 등록이 무조건 영업 비밀을 노출하는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며 "인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 수도 없는 화학물질로 지켜야 하는 영업 비밀이란 게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고 주장했다.

◈ 무엇보다 국민 건강이 우선

그는 "국민이 입을 건강상의 손실과 개별기업의 손실 중 어느 것을 더 중요하게 살필 건지 따져야 한다"며 "앞으로 국제환경규제는 더 심해지면 오히려 기업들에겐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인데 왜 경쟁력이 사라진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화평법은 EU의 REACH보다 강력하지 않다. 더구나 국내 업체들은 그렇게 강력하다는 REACH 기준에 맞춰 화학제품을 EU시장에 수출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 기업은 화평법의 규제를 완화하거나 시행령을 통해 예외규정을 넣어달라고 애걸복걸한다. '외국 국민만 건강하면 그만'이라는 주장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화평법과 그 시행령의 수위를 낮춰선 안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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